국립창극단의 창극 ‘패왕별희’ 포스터. 사진 국립극장
국립창극단의 창극 ‘패왕별희’ 포스터. 사진 국립극장

‘사면초가(四面楚歌)’라는 말이 있다. 물러설 곳 없이 고립된 상태. 서울 구도심의 오래된 주택을 상가로 리모델링하는 공사 현장에 매일같이 붙어 앉아 있는 요즘 내 심정이 딱 그렇다. 1968년에 지어진 이 붉은 벽돌집은 무슨 사연이 그리 많은지 바닥을 철거하자 공부 서류에도 없던 지하 벙커가 나타나는 식으로 상상도 못 했던 온갖 걱정거리를 쏟아낸다. 애초 예상했던 공사 기간과 비용을 훌쩍 넘어가면서 예쁜 디자인 숍을 만들어보겠다던 새 희망의 싹은 어느새 시들해지고, 이제는 온종일 근심 가득한 얼굴로 계산기만 두드리는 서글픈 신세다. 그런데 이 같은 사면초가의 위기에 처한 이가 과거 중국에도 있었으니, 그가 바로 항우다. 게다가 그쪽의 사정은 나보다 훨씬 딱하다.

때는 춘추전국시대. 전쟁에 나선 한나라의 왕 유방은 적진을 포위한 뒤, 한나라 군사들에게 초나라의 노래를 부르게 했다. 심신이 지쳐 있던 초나라 군사들은 그리운 고향 생각에 전의를 잃고 뿔뿔이 흩어졌다. 초 패왕 항우는 깊은 밤 사방에서 들려오는 초나라의 노랫소리를 들으며 자신의 오랜 연인이었던 우희와 이별한다. 우희는 항우를 위해 마지막 검무를 추고 난 후 자결한다. 그리고 항우는 승산이 없다는 걸 알면서도 홀로 적진에 뛰어든다. 항우의 이 암담한 상황을 일컫는 사자성어가 바로 사면초가다. 비운의 영웅 항우와 아름다운 우희의 애절한 사랑 이야기를 그린 ‘패왕별희’는 우리에겐 첸 카이거 감독의 영화로 잘 알려져 있다. 우희 역의 경극 배우를 연기한 장국영의 붉은 눈화장과 슬픈 눈빛은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4월 5일부터 14일까지 국립극장 달오름에서 ‘패왕별희’가 무대에 오른다. 이 공연에 대한 한 줄 소개를 ‘수원 왕갈비 통닭’ 식으로 뽑아보자면 이렇다. ‘지금까지 이런 공연은 없었다. 이것은 경극인가, 창극인가!’ 그렇다면 그 맛은 어떨까? 중국 전통 공연예술인 경극과 우리의 창극이 만나는 이 특별한 공연은 공개된 연출진의 면면만으로도 기대가 된다.

먼저, 연출은 대만의 국민 배우 우싱궈가 맡았다. 경극 배우 출신으로 장이머우가 연출한 2008 북경올림픽 공식 오페라 ‘진시황’의 주연을 맡기도 했던 그는 사라져 가는 중국 전통극 양식을 현대화하는 작업을 지속해온 대만당대전기극장의 대표다.

소리꾼 이자람은 음악감독으로서 극의 소리와 작창을 담당한다. 이자람을 ‘예솔아, 할아버지께서 부르셔’로 시작되던 옛 동요의 노래 잘하는 꼬마로만 기억하는 이들도 있겠지만, 현재 전통 음악계에서 이자람의 위치는 독보적이다. 1999년 스무 살의 나이로 8시간 동안 ‘춘향가’를 완창해 기네스북에 오른 그는 손꼽히는 소리꾼일 뿐만 아니라 장르의 경계를 넘나드는 창작자다.

창작자로서 이자람이 선보여온 일련의 작업들은 매우 흥미롭다. 주요섭의 단편 소설을 판소리로 재해석한 ‘추물/살인’은 신선한 충격이었다. 병풍을 두른 무대에 한 명의 소리꾼이 등장해 고수의 장단에 맞춰 구성진 입담을 늘어놓는데, 그 내용이나 연출 방식은 한 편의 연극에 가까워 마치 모노드라마를 보는 듯했다. 그리고 무대의 젊은 고수들은 북과 꽹과리뿐 아니라 기타와 아코디언, 카주 등 다양한 악기들로 장단을 맞췄다. 내가 판소리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가 된 공연이다.

당시 이자람은 무대의 악기들을 보고 신기해하는 나에게 “조선시대에도 기타가 있었으면 아마 사용했을 것”이라며 “드라마를 더 효과적으로 만들기 위해 좋은 걸 갖다 쓰는 것일 뿐”이라고 대수롭지 않은 듯 말했다. 하지만 그가 ‘아마도이자람밴드’의 보컬이자 기타리스트임을 감안하더라도 상당히 파격적인 시도였다. 다른 작품들은 어떤가? 브레히트의 서사극을 창작 판소리로 옮긴 ‘사천가’와 ‘억척가’, 마술적 리얼리즘의 남미 문학을 대표하는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작품을 판소리화한 ‘이방인의 노래’ 등 이자람의 판소리엔 경계가 없다. 그가 들려주고 보여주는 판소리는 박제된 과거의 소리가 아니라 현재진행형의 색다른 공연예술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재미있다.

국립창극단의 ‘패왕별희’에서 또 하나 주목해야 할 것은 의상이다. 영화 ‘와호장룡’으로 제73회 아카데미 미술상을 수상한 팀 입(Tim Yip)이 이번 공연의 의상 디자이너로 참여한다. 유수의 영화와 오페라, 연극을 비롯해 영국의 혁신적인 무용단 아크람 칸 컴퍼니의 의상을 담당하고, 샤넬, 펜디 등 유명 패션 브랜드와 협업해온 그는 전 세계를 무대로 활동하는 비주얼리스트다. 2009년 국립극장에서 열린 ‘세계 국립극장 페스티벌’의 개막작이자 우싱궈 연출과 서극 감독의 공동 연출로 화제가 되었던 음악극 ‘태풍’의 의상 디자이너였던 그가 10년 만에 다시 우싱궈 연출과 함께 한국을 찾은 것이다. 경극과 같은 전통 문화에서 새로운 시각 언어의 답을 찾는 그의 의상 디자인은 동양의 신비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패왕별희’를 위해 그는 중국 전통 복식의 화려한 색감과 한복의 고운 선을 살린 뉴오리엔탈리즘 의상을 완성했다. 경극의 양식과 창극의 소리가 만나는 이번 공연에서 의상은 배우의 목소리와 몸짓만큼이나 의미 있는 표현 도구다. 청각 중심의 공연인 창극과 달리 경극은 시각적인 효과를 중요시하는 예술 장르이기 때문이다.

동대문 원단 시장까지 직접 찾았을 정도로 이번 작품에 열의를 보인 팀 입이 잠시 한국에 머무는 동안 그를 만났다는데, 그에 따르면 경극의 의상 보관함은 마술 상자와도 같다고 한다. 그 상자 안에서 물건들을 꺼내는 순간 스펙터클한 대서사시가 펼쳐진다. 광활한 대륙을 뒤덮는 천만 대군이 튀어나오고 수천 년의 세월이 순식간에 지나간다. 의상만으로도 그 모든 것이 다 표현된다는 얘기다.


우싱궈 연출과 음악감독 이자람이 함께 서 있다. 사진 국립극장, 김시훈
우싱궈 연출과 음악감독 이자람이 함께 서 있다. 사진 국립극장, 김시훈
영화 ‘패왕별희’에서 경극 배우로 분장한 장국영. 사진 노바엔터테인먼트
영화 ‘패왕별희’에서 경극 배우로 분장한 장국영. 사진 노바엔터테인먼트

상징적인 요소 단순화해 이해하기 쉬워

서양에서 ‘베이징 오페라’라고 불리는 경극(京劇)은 한자어 그대로 ‘북경에서 발전한 연극’이다. 귀족의 저택에서 열리는 향연의 일부로 시작됐는데 원래 테이블 하나와 의자가 무대 세트의 전부였다고 한다. 이 때문에 경극에서는 무수한 상징과 기호가 이야기의 배경을 대신한다. 예를 들어 4개의 깃발을 어깨 뒤에 꽂은 장군이 등장한다면 거대한 군대가 그를 따르는 모습을 상상하면 된다. 경극에서 ‘4’라는 숫자는 ‘많음’을 뜻한다. 팀 입이 보여준 ‘패왕별희’의 의상 스케치에서 주인공 항우는 무려 6개의 깃발을 꽂고 있다. 그러니까 이건 어마어마한 대군이다.

물론 경극을 전혀 모른다고 해도 창극 ‘패왕별희’를 이해하는 데 어려움은 없다. 디자이너 팀 입과 연출가 우싱궈는 다소 복잡하게 느껴질 수 있는 경극의 상징적 요소들을 단순화했다. 디테일한 설명들을 추상화해 아름답고도 시적인 이미지로 변형했다. 팀 입은 “젊은 세대에겐 새로운 형태의 예술이나 패션처럼 느껴질 것”이라고 자신했다.

창극 배우들이 선보이는 춤과 무술 또한 색다른 볼거리다. 스토리 자체도 기존의 경극 ‘패왕별희’와는 조금 다르다. 이번 작품은 사마천의 ‘사기(史記)’와 경극 ‘홍문연(鴻門宴)’ ‘패왕별희’를 바탕으로 다시 쓰였다.

사실 항우와 우희의 사랑과 이별에 대한 가슴 절절한 이야기 자체는 후대 사람들이 여러 세월에 걸쳐 상상으로 써내려 간 것이다. 실제 역사책(‘사기’ 중 ‘항우본기’)에서는 “항우에게는 이름이 ‘우’인 미인이 있었는데 총애하여 늘 데리고 다녔다” 정도로만 둘의 관계가 잠깐 언급됐을 뿐이다. 만약 항우와 우희의 진짜 이야기가 기록으로 세세히 남아 있었다면 그렇고 그런 치정관계나 통속적인 연애사에 불과했을지도 모른다. 언제나 현실보다는 상상 속의 세계가 매혹적인 법. 그러니까 낡은 건물을 사고 고치는 일도 그렇다.


▒ 이미혜
패션·미술 칼럼니스트, 문화기획자, 보그코리아 컨트리뷰팅 에디터

이미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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